의료보험의 보장 항목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미국 오레곤주의 방식

우리나라 건강보험에서 보장되는 항목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결국 정부 마음이라고 생각되지만 법적으로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라는 곳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장 항목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료, 수가 등 건강보험의 중요한 내용을 심의, 의결하는 기관입니다.

위원은 총 25명인데 의약계 추천 인사 8명, 공무원(위원회의 위원장이 되는 복지부 차관과 기재부, 복지부 소속 공무원 2명) 3명,

복지부 장관 추천 4명, 건보공단 이사장 추천 1명, 심평원 추천 1명, 근로자단체 추천 2명, 사용자단체 추천 2명,

시민단체/소비자단체/농어업인단체/자영업자 단체가 추천하는 각 1명씩 총 4명입니다.

 

그동안 건강보험과 관련된 내용이 결정되는 과정을 보면

건강보험료가 흑자를 보거나 정치적인 고려가 필요할 때는 갑자기 많은 것을 보장해주고

적자를 볼 때는 갑자기 보장 기준을 축소하는 등 어떤 기준이나 합의 없이

임의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2006년 시행된 6세 미만 소아 입원 본인 부담 면제였습니다.

당시, 소아 환자 입원이 급증하여 정작 필요한 아이들의 입원이 지연되는 등

큰 문제를 낳았고 결국 폐지되었습니다.

 

건정심 입장에서는 기계적인 과정을 거쳐서

새로운 것  하나 더 보장해주고, 또 기존에 보장해 주던 것 하나 제외하고 하는 식으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보장 내용에 해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건강, 더 나아가 생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투명한 과정을 거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옳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외국 사례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미국 오레곤 주의  Medicaid에서 도입한 방법으로

질환, 시술 들의 우선 순위가 미리 결정되어 있고 오레곤 주의 예산에 따라서 어디까지 보장할 지를 정하는 제도입니다.

 

우선 Medicaid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민간 보험이 중심을 이루는 미국에서 국가가 보조하는 의료 제도가 있는데

Medicare와 Medicaid가 이에 해당합니다.

Medicare는 65세 이상 인구를 대상으로하고 연방정부에서 주관하는 보험이고

Medicaid는 65세 미만의 저소득층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며

재정은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 부담하고 운영은 주정부가 맡습니다.

 

이제 오레곤주 Medicaid의 Prioritized list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레곤주의 Medicaid를 관장하는 Oregon Health Plan에는 11명으로 구성된 Health Services Commission이 있는데

의사 4명, 치과의사 1명, 소비자 대표 4명, 공공의료 간호사 1명, 사회복지사 1명으로 구성됩니다.

Oregon Health Plan은 이들의 검토를 거친 우선 순위 리스트를 만들게 됩니다.

최신판은 지난 4월 1일자로 발표되어 금년 10월 1일부터 발효되는 리스트입니다.

이 리스트를 보면 1순위는  임신중 케어입니다.

Oregon Priority List 1

Oregon Priority List 1

 

2순위는 출산 및 신생아 케어이며 3순위는 출산 이후 10세가 될 때까지 예방 진료 서비스입니다.

이런식의 리스트가 우선순위 692번까지 이어집니다.

이를 놓고 주정부의 예산에 따라서 몇번까지 보험으로 보장해 줄 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리스트를 보면 2012년 1월 1일 기준으로 498번까지 보장하도록 결정되어 있습니다.

Oregon Priority List 2

Oregon Priority List 2

즉 498번인 만성 부비동염 (축농증이라고 하지요)에 대한 내과적, 수술적 치료까지는 Medicaid에서 커버가 되고

499번인 각막염 및 신생혈관 형성에 대한 치료는 커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Health Services Commission의 심의에 따라 우선 순위에 변화가 올 수 있으며 주정부의 예산에 따라 커버해주는

순위가 결정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Health Services Commission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이런 리스트를 만드는 것일까요?

(이하 내용은 Oregon’s Experiment with Prioritizing Public Health Care Services의 내용 참고)

경제학적인 비용-편익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QALY (quality-adjusted life years)의 개념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삶의 질과 양을 동시에 감안한 개념입니다.

즉 완전히 건강하게 1년 사는 것을 1이라고 하고 사망한 것을 0으로 보고, 병이 있는 상태에서의 상태를 그 사이의 수치로 잡게 됩니다.

처음 이 리스트를 만들 때 비용-편익 분석 방법을 사용했더니 부분적으로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충치 때우는 것이 맹장염 수술하는 것보다 우선순위가 높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적 분석 결과에 바탕을 두고 Commission 위원들의 판단에 따라 상식적으로 명백한 경우 순위를 조절했습니다.

또한, 이 리스트는 2년에 한번 씩 업데이트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어떤가요? 획기적이지 않습니까?

오레곤주가 1990년에 이 제도를 처음 도입했을 때 ‘의료 배급제’가 등장했다고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그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우리나라에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생명에 우선 순위를 매기는 것이냐로 시작해서 시민단체, 환자단체는 물론 의료단체들도 들고 일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것 처럼 어느날 갑자기 6세 이하 입원비 무료를 들고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6세 이하의 입원비를 무료로 하는 것이 어떤 희귀병의 치료비 부담을 줄이는 것과 비교해서

우리 사회에 더 중요하다고 결정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마찬가지로 건강보험에서 식대를 보장해주는 것이 MRI나 초음파를 보장해주는 것도 중요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아마 당시 건정심에 참여한 분들, 복지부 고위 공무원들 중 누구도 뚜렷한 근거를 대기는 힘들 것같습니다.

 

오레곤주의 방식은 그때그때의 편의나 정치적 고려에 휩쓸리지 않고

뚜렷한 근거에 바탕을 둔,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되어 있는 리스트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훨씬 앞서간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런 리스트를 도출해내고 시민들의 동의를 구한다는 것은 보통 정치력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를 이끌었던 분이 당시 주의회 의원이자 응급의학과 의사인 John Kitzhaber인데

이분은 1995년에서 2003년에 걸쳐서 Oregon 주지사를 역임하였으며

2010년부터 다시 주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위의 리스트만으로 모든 종료의 의료 행위에 대한 보험 적용 여부를 결정해 주지는 못합니다.

예를들어, 아주 비싼 항암제가 있을 때 이를 커버해 줄지는 위의 리스트가 결정해 주지 못합니다.

대장암의 예를 보겠습니다.

 

Colon cancer

Colon cancer

내과적, 외과적 치료 방법이 커버되며 여기에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가 포함된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검색만으로 찾지는 못했지만

특히, 항암제와 같이 가격이 비싸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경우에는 별도로 세부 기준을 정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만, 위의 Prioritized list 뒤에 보면 여러가지 경우들에 대한 세부적인 Guideline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Guideline Note 12는 효용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의 암 치료

(GUIDELINE NOTE 12, TREATMENT OF CANCER WITH LITTLE OR NO BENEFIT)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진행된 전이성 암을 가진 환자로 생명 연장을 목적으로 하는 치료를 시행하는 것에 대해서 아래의 경우에는 보험 적용을 해주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1. 암과 무관한 질환으로 인해  2개 이상의 장기 기능이 저하되어 있어 치료 효능 혹은 부작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

또는

2. 항암 치료에도 불구하고 컨디션이 저하되어 Karnofsky Performance Status < 50% 이면서 ECOG Performance Status 3 이상인 경우

오해를 막기 위해서 통증을 줄이거나 삶의 질을 높이려는 목적의 Palliative care에 대해서는 보험 적용을 해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 도입은 쉽지 않아 보이지만

의료보험을 적용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사례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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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이런 자료는 어떻게 찾으셨나요? ㅎㅎㅎ
    선거철마다 움직이는 건보평가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보건경제학 책에 사례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관심있으시다면 보건경제학은 한번 공부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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